다자이 오사무에게 사랑받은 도시, 후나바시

更新日:令和3(2021)年11月12日(金曜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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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애착이 깊었던' 도시

쇼와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아오모리현 기타쓰가루군 가나기무라(현: 고쇼가와라시)에서 태어나, "부악백경(富嶽百景)" "달려라 메로스" "쓰가루(津軽)" "사양(斜陽)" "인간실격(人間失格)"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으나, 쇼와23년(1948년)에 기타타마군 미타카초(현: 미타카시)에 있는 다마가와조스이라는 하천에 몸을 던져 39세로 요절했습니다.

흐트러진 사생활, 인간관계의 트러블, 진통제 의존……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다자이이지만,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염세적, 퇴폐적, 비관주의적인 인물상입니다.

대지주의 집에서 태어났음에도 고향인 쓰가루를 떠나, 도쿄 부근에서 주거를 전전하다 짧은 생을 마친 다자이.
그런 그가 자신의 회상기 "15년간"(1946년) 속에 '가장 애착이 깊었다'고 기술한 도시가 바로 후나바시입니다.

1년 3개월의 후나바시 생활

맹장염이 악화되어 복막염이 되고, 진통제 파비날 중독이 되어버린 다자이가 요양을 위해 도쿄 스기나미에서 후나바시로 이사한 것은 1935년 7월 1일, 26세 때였습니다.다자이는 여기에서 내연녀였던 “하쓰요"와 함께 1년 3개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画像 画像 画像
※사진은 모두 쇼와 초기의 것.왼쪽부터 차례로 국철 후나바시역 남쪽출구, 혼초도오리(후나바시역 남쪽출구 근처), 후나바시마치 사무소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다자이는 여기에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시간을 보냈고, 그와 관련된 장소는 지금도 다수 남아 있습니다.
다자이 팬이라면 꼭 보아야 할 곳을 몇 곳 소개합니다.

에비카와 강 옆에 집을 빌려 거주

다자이가 이전에 살던 집은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후나바시초 이쓰카이치 혼주쿠 1928번지에 있던 신축 가옥이었습니다.현재 주소는 '후나바시시 미야모토 1초메'.후나바시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위치입니다.

현재 이 가옥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주택이 세워져 있습니다.후나바시역 앞의 활기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의외라고 생각될 정도로 조용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주택가.차도 거의 다니지 않습니다.
근처에는 에비카와 강이 지금도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다자이가 사랑한 “협죽도”

다자이가 후나바시 집에 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에 사는 사람에게서 “협죽도”를 받아 정원에 심었다고 합니다.고향인 쓰가루에서는 귀했던 협죽도.후일 이 집에서 퇴거할 때도 이 협죽도에 대한 애착을 표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메쿠라 소시(めくら草紙)"(1936년)에서

"내가 이 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1935년 7월 1일이다.8월 중순경 나는 이웃집 정원에 있는 3그루의 협죽도에 마음이 끌렸다.가지고 싶었다.나는 집사람을 이웃집에 보내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1그루 주실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드려보라 하였다."

다자이가 이웃에게 받아 자택 정원에 심었다고 하는 협죽도는 1983년 중앙시민회관 앞 광장으로 이식되어, 현재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또, 근처에는 문학비도 건립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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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후나바시시 혼초 2-2-5

【폐관】집필에 몰두한 곳 "갓포료칸 다마가와"

'다마가와'라는 단어를 들으면 다자이 팬들이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마 그가 몸을 던져 최후를 맞이한 "다마가와조스이"일 것입니다.
후나바시시에는 기이하게도 같은 '다마가와'라는 이름을 가진 료칸이 있습니다.

다이쇼10년(1921년)에 창업한 역사 있는 순일본식 료칸 "갓포료칸 다마가와"는 지금도 연회나 숙박 등을 위해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고 있는 후나바시를 대표하는 료칸으로, 2008년에는 국가 등록 유형문화재로도 지정되었습니다.

그런 다마가와의 '깃쿄노마'라는 방에서 다자이는 20일 정도를 묵으며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숙박비용을 지불할 수 없어, 그 대신 책과 만년필을 료칸에 두고 갔다고 전해지지만, 1976년 료칸 본채에 화재가 발생해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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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쇼와 초기의 료칸 다마가와 오른쪽 사진……현재의 료칸 다마가와

(주소)후나바시시 미나토초 2-6-25

고코노에바시 다리

에비카와 강에 “고코노에바시 다리”가 놓여진 것은 1934년경입니다.현재의 다리는 쇼와63년(1988년)에 다시 건립된 것으로 당시 다자이가 건넌 다리는 아닙니다만, 이전에 살던 곳에서 가깝기 때문에 다자이를 그리며 초상과 연보, '달려라 메로스'의 한 구절, 소설 중 한 장면의 릴리프가 난간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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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카와 강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 있어, 후나바시 산책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에비카와 강 13교 투어'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조해 주세요.

오쿠라이나리 신사

후나바시 시절 다자이는 이나리 신사의 여우 석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는데, 이 사진은 단행본 첫머리에 넣는 사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이 사진이 찍힌 장소로 전해지고 있는 곳은 후나바시시 혼초 4초메에 있는 '오쿠라이나리 신사'입니다.후나바시역 남쪽출구를 출발해, 음식점 등이 늘어서 있는 번화가를 빠져나가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선명한 빨간색의 도리이.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이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는 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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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후나바시시 혼초 4-31

괴롭고도, 애착이 깊었던 후나바시 시절

다자이는 후나바시에서 "다스 게마이네" "지구도" "메쿠라 소시" "허구의 봄" "광언의 신" 등의 작품을 집필했으며, 그 외 최초의 단편집 "만년"을 발표했습니다.
이 실적만 보면 충실된 창작활동을 했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쿠타가와상” 좌절

다자이가 후나바시에 살기 시작한 달의 다음 달인 1935년 8월, 제1회 아쿠타가와상 발표가 있었습니다.다자이는 후보에 올랐지만, 낙선(수상작은 이시카와 다쓰조 '창맹(蒼氓)').문단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 빚투성이 생활을 벗어나야 한다는 초조함…… 다자이는 수상을 강하게 바라고 있었던 만큼 더 크게 낙담했을 것입니다.전형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분노를 드러낸 문장을 발표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또, 같이 전형위원이었던 사토 하루오에게는 제2회의 수상을 간절히 원한다는 편지도 보냈습니다.

그런 바람도 허무하게 제2회 아쿠타가와상 전형 결과는 '수상자 없음'.지금은 뛰어난 지명도를 자랑하는 인기 작가 다자이이지만, 마지막까지 아쿠타가와상 수상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최초의 단편집을 간행

후나바시에 체류한 지 약 1년이 경과한 1936년 6월, 다자이는 최초의 단편집 "만년"을 스나고야쇼보에서 간행했습니다.다자이에게 있어 최초의 단행본이며, 타이틀은 "만년(晩年)".젊은 나이에 죽음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던 다자이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진통제 중독으로 요양을 위해 후나바시로 이사해 왔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 건강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입원, 후나바시와 이별

진통제 파비날에 의한 중독이 심해진 다자이를 구하고자 가족과 지인들은 입원을 권했습니다.1936년 10월 13일, 이부세 마스지의 설득으로 다자이는 도쿄 이타바시에 있는 무사시노병원에 입원을 했고, 후나바시 집에서는 퇴거를 하게 되었습니다.병을 이겨내지 못했고, 인기 작가도 되지 못했던 후나바시 시절.그래도 다자이는 이후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년간"(1946년)에서

"나에게는 지바 후나바시초 집이 가장 애착이 깊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집에서 나와야 했던 날에 나는, 부탁이오!하룻밤 더 이 집에서 자게 해 주오, 현관 협죽도도 내가 심은 것이오, 정원의 벽오동도 내가 심은 것이오, 라며 어떤 사람에게 매달려 남의 이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울어버린 것을 잊을 수 없다画像
다자이가 심은 협죽도는 지금도 새 가지가 돋아나고 있습니다.

다자이가 왜 후나바시를 '가장 애착이 깊었다'고 했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다자이가 후나바시를 떠난 지 8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단, 지금도 후나바시에는 다자이와 관련이 있는 곳이나 다자이가 생활했던 쇼와 초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긴 시간의 격차는 있지만, 같은 장소에 서 보고, 걸어 보면……
다자이가 생활했던 1년 3개월이 어슴푸레 보일지도 모릅니다.